첫 번째 챕터를 읽고

경험하지 못한 타인의 심경을 이해한다는 것,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것

“우리가 한바탕 이별을 했을 때”를 읽고

학업을 중단한 학교밖 친구들을 지원하는 곳에서 활동 한 지 5개월 째다. 최근에 학업 중단 특성은 저연령화, 병리적 사유로 자퇴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자해, 자살 시도, 학업 스트레스 등으로 정신과 상담, 우울증 약을 처방 받은 사례를 자주 듣게된다. 특히, 한부모 가정에서 청소년이 받는 스트레스와 충격이 매우 클것이다.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라 그 정신적인 충격을 알지는 못한다. 여러 이유로 정신과 약을 처방하고 복용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병리적 상황에 놓여있는 청소년의 심경은 어떤 것일까? 그 마음은 어떻게 헤아려야할까? 그래서 전문 상담 선생님이 필요한 것인가 보다. 최근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떠나 보내드리고 일주일 여간 정신이 멍한 채로 놓여있었나보다. 아내 말로 멀쩡한 척해도 ‘자기는 정신이 나가있는것 같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들은적이있었다. 그 멍함이, 정신이 혼미해짐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때 스치듯 알게되었다. 가까운 존재와 이별을 마주한다는 것은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갖게 되는 듯하다. 경험하지 못한 타인의 심경을 이해한다는 오만.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되새겨본다. (김기봉)

“나는”을 쓰기 위해 나는

“글쓰기는 나와 친해지는 일”을 읽고

학교에서 영화비평을 공부했다. 처음 배운 건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글에서 "나는"을 찾아 지우는 일이었다. "나는"은 비평의 전쟁에서 나를 불리하게 만드는 단어였다. 건조한 언어를 가져야 승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이는 사실 일정 부분 맞는 말이다. 하지만 건조한 언어를 좇다 보면 결국 나의 세계까지 빛을 잃게 된다는걸, 아주 짧지는 않은 지난 평론가 인생에서 깨달았다. 이제 나는 "나는"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곳에 내가 상실했던 무언가가 있다. 비평은 형식일 뿐이다. 누가 나의 글을 두고 비평이 아니라고, 이건 에세이라고 해도 괘념치 않으려 한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이니까. (임종우)

'엄마'가 된 지금, 비로소 '나'를 찾기

"나를 천천히 들여다보면"을 읽고

헤어짐이라는 단어를 처음 깨달았던 나이는 19살이었다. 그때 참 좋아했던 언니가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이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렇게 나도 10대를 마치고 20대를 맞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20대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임신, 출산, 육아 같은 큰 일이 있었는데, 내 20대는 이상하게 안개가 낀 터널 같다. 어느 날 아이가 나에게 '엄마는 꿈이 뭐야'라고 물었다. 그 순간, 나는 뒤돌아서 다시 그 긴 안개 낀 터널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헤어지지 못한 나의 미련을, 다 기억나지 않은 20대의 시간을 다시 찬찬히 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난 어떤 시간을, 만남을 가로질러 여기 있는 것일까. 나도 나를, 천천히 들여다봐야겠다. (명소희)

나만의 산책을 즐기는 방법

"용감해지는 자리를 잘 아는 사람"을 읽고

탄천을 걸을 때면 누군가는 나의 앞에서 걷고 있다. 그럴 때면 앞서 걷고 있는 사람을 목표로 하여 속도를 높이고 결국 제친다. 이런 걷는 습관은 숨을 가쁘게 만들고 이는 나의 걷는 속도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속도를 내어 앞선 사람을 넘어서더라도 그 앞에는 또 누군가 있을 것이고 따라잡을 수 없는 누군가도 보일 것이다. 하지만 앞선 누군가는 그저 "앞에 있는 것" 뿐이다. 속도를 늦추고 나의 발걸음에 집중하게 되면 당당하게 걷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산뜻한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이건욱)

불안함 속에서 살아내기

“나를 천천히 들여다보면”을 읽고 

나는 미래에 대해 걱정이 많으면서 정작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 내가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조차 몰라 그저 불안함만 느끼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나는 뭐에 초점을 두고 내일을 준비해야 하는지 고민만 많을 뿐이다. 얼마 전 취업특강을 들으면서 들었던 생각이 있다. 본인 일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잘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가끔은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일이 내가 좋고 행복함을 느낀다면 된 거 아닌가 싶다. 나도 이것저것 열심히 하다 보면 그 감정을 느끼는 때가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급하지 않게, 오늘 차근차근 나를 들여다보면서 내일을 맞이 해야겠다. (홍지희)

나를 믿는 용기

“용감해지는 자리를 잘 아는 사람”을 읽고

전보다 요새 부쩍 혼자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꽤 많은 시간을 혼자있는 것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잠깐 여러 사람들과 며칠 있었다고 지금 이 시간이 어색하기만 하다. 그래도 이번년도 가장 큰 목표를 ‘나를 더 아껴주고 들여다보기’로 잡고 있었던 터라, 이 시간이 효율적으로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쓰려고 한다. 사람들과 있을 때, 난 꽤나 괜찮은 사람이다. 긍정적이고, 잘 흔들리지 않고, 내 주관이 뚜렷한 말그대로 ‘알아서 잘’하는 사람이다. 나또한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서로가 경쟁자 아닌 경청자가 될 때, 삶의 결을 섬세하게 살피는 관찰자가 될 때 우린 누구나 괜찮은 사람이 된다.” 이 구절을 본 순간 든 생각은 작가의 의도와 달리 나는 뜨끔했다. 괜찮은 사람..나는 괜찮은 사람인걸까, 괜찮은 척 하는 사람인걸까. 이 생각이 잠깐 스침과 동시에 약간의 자괴감이 양심을 스쳤다. 지금까지 부모님께, 선생님께, 친구들에게, 나를 이름과 얼굴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부족함을 숨기려 나를 과대하게 포장하고 있었던 것을 아닐까. 그렇게 잠깐을 동굴 속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친한 친구들과 대화를 하거나, 글을 쓸 때면 나는 또 괜찮은 사람이 되어 용감하게 말을 한다. 그 모습을 인지한 순간, 이제는 괜찮은 사람인 걸 부정하는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나는, 꽤나 괜찮은 사람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부정하지 않고, 나를 믿어주기로 결심했다. 혼자 있는 시간에 성찰이라는 변명으로 나를 자책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나를 아껴주기로 결심한 나의 올해 목표를 되새기며 나를 좀 더 믿어주기로 했다. (조소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