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하는 시민비평

가족이라는 운명과 그 너머

<방문>(명소희)을 보고 생각한 것

이십대 중반 때였나, 서른이 되면 절연해야지, 결심한 적이 있다. 가족과 함께 이어가는 삶이 지옥과도 같았다. 매순간이 억압이었다. 문을 닫으면 내 방 통째로 어디론가 날아가버렸으면 했다. 그랬던 내가 이제 서른을 앞두고 있다. 그때 가졌던 감정이 적잖이 민망하고 쑥스럽다. 우선 가족에 대한 마음이 많이 바뀌었다. 가족 이전에 구성원 한 명 한 명을 자기 삶을 이끌어가는 주체로 보니 각자가 품은 고민과 슬픔이 보였다. 안쓰러웠다. 무엇보다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제는 애틋하다. 신동민 감독의 <당신에 대하여>를 2020년 인디포럼에서 보았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당신에 대하여, 당신에 대하여, 당신에 대하여…’ 영화의 이름을 되뇌었다.

올해는 명소희 감독의 <방문>을 보았다. 감독은 어른이 되었을 때 춘천을 떠나 서울로 이주했다. 시간이 지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족을 꾸렸다. 그 과정에서 춘천은 소속이 아닌 “방문”의 대상이 되었다. 영화는 이제 거리를 두고 그곳을 바라보려 하다가도 때때로 유년의 기억과 감각이 그를 붙잡아 당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미지로, 텍스트로, 사운드로. 과거와 현재의 긴장관계를 생각해본다. 과거의 현재화, 과거의 반복과 변주로서 현재. 내가 <방문>과 명소희 감독에게 배운 점은 시간의 파도, 기억의 파동에 몸을 맡겨보는 태도다. 돌아가야 한다면, 그래야 내가 놓친 걸 되찾을 수 있다면, 돌아가야지. (임종우)

치부를 드러내는 용기

<일하는 여자들>(김한별)을 보고

국민에게 끊임없이 정의에 대해 논하는 수많은 방송사들이 움찔했다. 바로 방송작가 노동조합연합인 ‘방송작가유니온’ 때문에 말이다. 말그대로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혔다. 그 도끼는 오랜시간 아프고, 끊임없이 상처받으면서 더욱 단단해졌고, 아찔하게 날카로워졌다. 신나게 정의로운 척하던 방송사들은 자신 내부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는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었고, 이 다큐멘터리를 그것을 날카롭게 찍었다. 방송작가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프리랜서라는 포장지를 씌워 부당하게 이용했고, 그 부당함에 대가를 치뤄주지 않았다. 방송을 사랑하고, 그것이 가진 영향력을 좋아했던 이 여자들이 말도 안되는 부당한 대우때문에 포기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올라왔다. 분명 방송작가가 꿈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느새인가 그들에게 공감하고, 연대감과 분노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 부당함에 맞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용기있게 세상에 외친다는 것. 그 얼마나 아름답고, 정의로운 모습인가. 

이 다큐멘터리는 단순하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작가들이 노조연합을 만들어 싸우고 있다!라는 것만 담지 않았다. 제목인 ‘일하는 여자들’의 집에서의 모습도 추가적으로 담았다. 방송작가유니온의 지부장인 이미지작가의 집을 갔다. 그녀는 집에 찾아온 후배들을 반겼고, 밥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식탁엔 온통 방송에 관한 자료들이 널려있었다. 그녀는 집에서조차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집에 올 남편의 눈치를 보면서 밥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이미지작가는 남편을 ‘요리를 좋아하는 남자’라고 표현했다. 남편이 아닌 남자로 지칭하는 것부터 육아의 책임 또한 이미지작가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득 일하는 여자에게 육아는 어떤 의미일까? 생각이 들었다. 왜 여자는 아이가 태어날때부터 삶이 멈추는가. 왜 육아로인한 경력단절은 해결되지 않는가. 여러 이유들이 존재하겠지만,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엄마가 아닌 여자로, 아내가 아닌 여자로, 집이 아닌 밖에서 일하는 여자도 대우받는 세상이 필히 와야한다. 

과거 너무 힘들고 아팠던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겠다는 절박함 하나로 무게를 견디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지 못하고, 방송국과 피디들의 입맛에 맞춰 억지로 글을 쓰던 그녀들이 글이 아닌 입을 열었을 때의 그 파장력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울림깊은 이 외침은 언젠가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고, 그 울부짖음에 응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작 할 수 있는것이 글뿐이라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그녀들의 용기에 존경과 응원을 보내본다. (조소희)

우리에게 머리카락은 무슨 의미일까

<머리카락>(이미해)을 보고

세상에는 수많은 머리 스타일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단정한 짧은 커트는 남성을, 긴 머리는 여성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 남자아이들은 이발기로 머리를 짧게 유지하고 여자아이들은 머리를 길게 길러 묶거나 양 갈래로 땋았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우리는 어려서부터 여성은 여성으로, 남성은 남성으로 만들어졌다. 너무나 당연하게 남자는 머리가 짧고, 여자는 단발 이상의 머리를 가지게 되었다. 이미해 감독의 <머리카락>은 여성으로서 당연시 여겨졌던 머리카락에 관한 수많은 편견을 들여다보고, 여성들의 인터뷰를 통해 여성의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가부장 제도가 만든 여성의 아름다움으로만 소비되고 있다는 현실을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에게 머리카락은 무슨 의미일까. 

조선시대 여성에겐 검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필수조건이었고, 짧고 뻣뻣한 머리카락은 부정적이고 추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렇기에 단발은 여성에게 기성세대를 향한 도전이기도 하였다. 최근 ‘단발병’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단발병은 왜 병일까. 몇몇 사람들은 예쁘지 않다 생각하니 자르지 않고, 단발 머리의 개그맨 사진을 보며 단발병을 퇴치한다고 한다. 우리는 왜 그렇게까지 하며 긴 머리를 고수하는 것일까. 다큐멘터리 속 여성들은 긴 머리, 화장하기 등 사회에서 여성적이라고 정의해 온 것들을 거부하는 탈코르셋 운동을 펼치고 있다. 탈코르셋 운동을 통해 오직 여성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아닌, 몸에 대한 나의 주도권을 찾아오는 과정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감독은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며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과정, 타인이 이야기하는 미의 기준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찬 자신의 몸을 구성하는 과정에 대해 보다 과감하게 질문하며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세상은 천천히 변화하고 있다. 여성들은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주체적이고 자신의 본질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지금도 머리카락을 자르며 사회가 요구한 기준인 여자로서 청순하고 예쁘게 보이기 위해 머리를 기르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기준으로 자신을 맞추고 있다. 여성들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할 수 있도록 스스로 나 자신을 만들어가며 행동한다. 머리카락도 그 과정 중 하나이지 않을까. 우리 모두 타인의 시선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길 바란다. (홍지희)

사라지는 존재들의 시간에 대한 귀 기울임

다큐멘터리 <개의 역사> 속 듣기 윤리에 대하여

 타르코프스키는 '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간이란 우리의 '자아'를 위한 존재 조건이다. 죽음이 찾아오면 개인적 시간도 소멸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시간 속에 있다. 시간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공평하게 자리를 내준다. 시간 속에서 모든 존재들은 평등하다. 동물, 식물, 물건, 사람 모두 존재하는 동안은 같은 위치에서 시간을 나눠갖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모든 것이 공평하지만은 않다. 힘이 없는 것들 정확히는 부를 같지 못한 존재들은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사라진다. 그 사라짐은 영화의 무수히 반복되는 대사처럼 "잘 죽은 것"이 된다. 같은 시간에 있어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들의 역사를 감독은 끊임없이 묻는다. 하지만 그 역사는 침묵으로, '찍지마세요.'라는 차단으로, 계속해서 가로막힌다. 그때마다 감독은 과거의 기억, 들뢰즈가 이야기한 순수 기억으로, 지나간 현재의 시간으로 도약한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침묵을 지켰던, 차단했던 과거의 시간을 되짚는다. 산다는 것에 대해 알고 싶었다는 감독은, 자신의 삶을 뒤돌아본다. 그리고 흘러가는 현재 이미지에 자신의 과거 시간을, 자신들이 만났던 시간들을 듣는다. 감독은 "사라진 백구가 다시 나타났다."라는 내레이션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살아간다.'라는 질문을 돌려준다. 이 영화는, 있지만 없는 존재들의 시간을 끊임없이 들으려 하고, 보는 이들에게 조차 그 역사에 귀 기울이게 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우리는 이 영화를 봐야 하고, 다시 봐야 한다. (명소희)

"왜"라는 한 단어에서 변화는 시작된다

<통금>(소람)을 보고

통행금지령 줄여서 통금은 과거 사회 공공질서 유지 및 질서 확립과 정치적 저항세력 억압 목적을 위해 국민의 자유를 박탈했다. 현재는 제도가 철폐되었지만 아직까지 누구에게는 통금이 존재했다. 어려서는 부모님이 정해주신 시간에 맞춰 들어와야 하는 통금이 존재했고 커서는 육아와 가사 노동으로 시간을 빼앗겨 나갈 수 없는 통금이 존재했다. 과연 이러한 통금이 개인과 가정 내에서 발생하는 규칙에 불과한 것일까 아님 사회적인 통제인 것일까? 감독은 질문한다. 

왜 부모님들은 딸들에게 통금 시간을 정해주는 것일까?, 밤거리가 안전해지면 통금이 사라질까? 왜 엄마라는 존재가 되는 순간 자신의 시간이 사라져가는 것일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숨 가쁘게 진행된다. 수많은 질문들이 덩어리져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대다수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 의문을 품는다는 것은 굉장히 도전적인 일이다. 그런 생각만으로 약자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이유를 말한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심한 욕설을 내뱉고 흘겨본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으면서까지 외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이제 우리가 외침에 대한 이유를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요즘 연일 화제가 되는 단어는 ‘페미’이다. 페미니스트를 줄인 말로 요즘 사회적으로 예민한 단어가 되었다. 사회적으로 패미니즘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지만 그 중심에는 성 평등이 있다. 성 평등을 위해 여성의 권리와 주체성을 확장하고 강화를 주장하는 운동가,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는 금기어가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또다시 의문과 생각에 대한 통제가 일어나고 ‘페미’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다시 침묵하게 된다. 하지만 ‘왜’라는 한 단어가 모여 서양 암흑기에서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 문명이 다시 번성했듯이 끊임없는 질문들이 변화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이건욱)

막막했던 삶과 남기고 싶었던 흔적들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배꽃나래)을 보고

비툴비툴 글씨를 쓴다. 배운다. 부끄러워한다. 기록한다. 이 작품은 글씨를 모른 채 막막함을 딛고 답답한 배움을 이어가는 할머니 그리고 관계를 유지, 맹세의 흔적들에 대한 할머니들에 대한 기록이다. 평생 한글을 모르시다가 늦은 연세에 문자 하나하나를 배우는 주인공을 보게된다. 배우는 과정에서 부끄러워 하시고 민망해 하시는 할머니, 그리고 애정 충만한카메라로 감독은 할머니를, 할머니들을 담아내고 있다. 

조선 사회에서 한글은 '암글'이라고 불리었다. 여자들이나 쓸 글이라는 뜻으로 한글을 낮잡아 이르던 말이었다. 반대로 한자는 '수글'이라 불렸는데 이는 잘 써먹는 글이라는 뜻이었다.

영화 속, 안치연 할머니가 읽는 내레이션에서도 알수 있다. 여자라는 이유로 배움에서 멀어진 할머니들, 기록 대신 기억하는 장치를 찾아낸 분들이다. 몰랐던 것에 대해 알고 나면 별게 아니다. 그러나 할머니들은 한글을 배우는 과정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울 수 있을게다. 배움의 과정에서 나오는 에너지, 열정에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할머니들이 어린 시절 유행이었다는 팔목 문신의 흔적을 보여주는 쇼트들이다. 무릇 선명해지는 것들은 위험을 관통해야 얻을 수 있는 듯하다. 할머니들의 문신 과정에서 깊은 관계 맺음을 위해 바늘을 깊게 찌르는 행위, 그리고 그 의미를 간직한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기억되지 못한다고 인터뷰에서 증언한다. 이 작품의 따스함은 크레디트에서도 다시 느껴진다. 그 따스함을 공유하고자 하는 측면에서 이 작품을 추천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기록하지 못해서 기억으로 감당해온 할머니들, ‘여자’라는 이유로 배움에서 배제된 것이다. 무엇을 기록하는가, 어떻게 기록, 기억을 해야 하는 지를 되짚어 보게한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얘기한 세 가지의 기억 중 순수 기억(잠재된 기억)을 소환하는데 어떤 상호작용이 필요한 것일까,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기록과 기억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김기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