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챕터를 읽고

그들의 마음들

“글쓰기 강좌에 여성이 몰리는 이유”를 읽고

영화평론가로서 결코 적지 않은 수의 강단에 서본 것 같다. 수백 명은 충분히 만났을 것 같은데 나 또한 남성 수강생은 손에 꼽는다. 되짚어보면 비평과 글쓰기에 대한 수요보다는 숨겨둔 어떤 마음을 확인해왔다. 몹시 우연히 등단했던 직업인으로서의 나는 이러한 쏠림이 솔직히 의아했었다. 쓸 수밖에 없고 말할 수밖에 없는 나와 쓰고 싶고 말하고 싶어 하는 참여자 사이에 커다란 마음의 차이를 생각해봤다. 여기에는 여러 맥락이 있을 것이다. 권력의 차이, 문화와 언어 자본의 차이, 그리고 젠더에 따른 생애경험의 차이 등이 우리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해할 수는 있지만 내가 정말 그 마음을 온전히 안다고 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이 불투명성이 종종 내 자리에 대한 자각을 환기한다. “쓰고 싶은 마음.” “말하고 싶은 마음.” 곱씹어본다. (임종우)

우리는 왜 항상 죄송할까

“여자는 왜 늘 반성할까”를 읽고

2017년 여름, 나는 태국 출라롱콘 대학교와 공동으로 다큐제작을 하는 워크숍에 참여하게 됐다. 그 때, 나는 아이와 친정부모님과 동행을 하게 되었다. 내가 없으면 매일 같이 울어대는 아이때문이었다. 그때의 나는 아침에 눈떠서 잠들 때까지 많은 사람에게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했다. 지금 생각하니 ‘뭐가 그렇게 죄송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지만, 여전히 나는 굉장히 자주 반성을 한다. 요즘은 아이를 키우는 여성으로서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병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다. 아마 그 고민은 ‘많은 사람들에게 죄송하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그 생각들이 좀 정리되지 않지만, 작업을 하면서 천천히 고민해보고 싶다. (명소희)

화장은 누구의 것인가

“화장하는 아이들”을 읽고

인간은 기원전 몇 천년 전부터 돌을 갈아서 화장을 했다. 세기 지나면서 화장을 하는 이유는 조금씩 바뀌었지만 자신을 가꾼다라는 의미는 같을 것이다. 화장을 한다는 것은 운동을 한다와 같은 자기관리의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운동은 모든 성별이 하는 자기관리이고 왜 화장은 대부분 여성의 자기관리일까. 또한 왜 화장은 어른들의 전유물일까. 이는 화장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사회적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운동하는 것처럼 화장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화장한다라는 단어와 맞는 것 같다. (이건욱)

당연하지 않은 것들

“분위기 깨는 자의 선언”을 읽고

학창시절, 시력이 나빴던 나는 수업을 들을 때에만 안경을 쓰다가, 버릇이 되어 평상시에도 안경을 쓰며 학교를 다녔다. 어느 평범한 날, 반 친구들과 사진을 찍을 때이면 친구들은 늘 나에게 물었다. 왜 안경을 착용한 상태에서 사진을 찍는지. 안경을 벗어야 더 예쁘게 나오기 때문에. 나는 안경을 쓰고 다니니까 그냥 안경을 착용한 상태에서 그저 사진을 찍었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친구들을 둘러보면 늘 안경을 착용하던 친구들은 사진 찍을 때만큼은 꼭 당연하게 안경을 벗었던 것 같다. 물론 사진을 찍을 때에 안경을 착용 하고 안 하고의 선택은 스스로의 몫이다. 우리 모두 생각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아닌 각자의 선택인 것이다. (홍지희)

감정에 솔직하다는 것, 절실한 시간을 보낸다는 것

“글쓰기 강좌에 여성이 몰리는 이유”를 읽고

초등학교 때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은 대부분 여자친구들이었다. 5학년때 우리반 반장 김0현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피아노학원을 다닌 친구였다. '남자가 무슨 피아노야'라고 당시에 생각했었다. 그러나 고3 무렵에 생각이 달라졌다. 고3 우리반 김0일은 피아노 뿐만 아니라 여러 악기를 배웠던 친구인데 무엇을 해도 감각이 참, 남달랐다. 피아노를 배워서 그런 지 기타연주도, 농구도 심지어 당구까지도 빠르게 배우는 친구였다. 특히,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친구로 기억된다. 지능이 높은 탓도 있겠지만 감수성이 좋은 존재였다. 부러웠다. 나는 반대로 내 감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억제하는 삶을 살아왔다. 사고뭉치 형 탓이기도하다. 소심한 내 성격이기도 하다. 형이 좀 많이 논 사람이어서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은 하지를 않았다. 오락, 만화, 당구 등 유희에 어두운 사람이다. 그런 이유로 어릴때 피아노를 배웠더라면 감정에 솔직하게 살아왔다면 좀 많이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으로 성장했을거라고 핑계를 대고는 했다. 어릴때 부터 30여 년 간 억제하는 삶에 익숙했다. 이것을 예전에는 형 탓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않다. 청소년 미디어교육, 대안교육, 영화 소모임, 다큐멘터리 비평쓰기, 마을미디어 등에 관심을 가지면서 어릴 때 보다 감정에 솔직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창작하는 삶에 익숙해 지고있다. 내 생각을 표현하는데 주저하지말고 행하는 삶, 작은 실천을 하는 나날들을 지내야 한다고 여기고있다. 그래서 앞으로 다가오는 시간이 나날들이 설렌다. 감정에 솔직한 삶, 그리고 무언가 절실한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 (김기봉)

감사합니다!

“차분히 불행에 몰두하세요”를 읽고

이 글을 읽고, 지난 날 내가 했던 의문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브런치 카페에서 알바를 하며 음료나 음식을 손님께 내줄 때 하는 “맛있게 드세요.” 손님이 다 드시고 그릇을 주실 때 “감사합니다!”라고 습관적으로, 그리고 의미없이 말한다. 그러다 문득 ‘맛있게 먹으라고 강요하는 거 같네? 왜 우린 항상 감사해야하는 걸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일하는 직원으로서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이긴 하다. 그러나 의미없는 말들을 습관적으로 내뱉으면서 느껴지는 기분은 그리 달갑지 않다.  아마 이런 말들을 내뱉는 순간이 일하는 순간이고, 일하는 이유가 아주 빠르게 연결되어 마지막은 한숨으로 마무리가 되기 때문인 것 같다. 대비되는 상황이 나를 잠시 삐딱하게 만들었나 보다. 저 사람들은 맛있게 먹고. 시간을 충분히 즐기다 가지만, 나는 라텍스장갑에 땀이 차도록 일을 해야한다는 그 사실이 우울했다. 그러나 나는 우울한 감정을 가지고도 밝게 내뱉어야 했다.

“감사합니다!” 같이 일하는 동생과 헛헛한 웃음을 주고받고 다시 축축한 라텍스 장갑을 끼면서 생각한다. ‘누군가 돈을 쓸 때, 나는 돈을 모으고 있다.’ 그렇게 나를 달래곤 한다. 이런 상황은 분명 미래의 나에게 ‘감사한 일’이 될 테니까. 그저 몰두하자. 내가 선택한 현재라는 불행에 차분하게, “감사합니다.” (조소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