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하는 시민비평

바라보는 시선에 대하여 

<내 목소리가 들려>(송원찬, 오혜원, 권혁희)와 <Q에 대하여>(정수인)를 연결하며

사랑,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이다. 인생은 사랑을 매개로 하여 아름다울 수 있으며, 또한 그 가치가 귀하게 된다. 사랑은 인격적인 교제, 인격 이외의 가치와의 교제 또한 가능하다. 그렇기에 같은 젠더의 사람들 사이 성적인 끌림을 느낄 수 있는 감정 또한 우리는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오혜원, 송원찬, 권혁희 감독의 <내 목소리가 들려>와 정수인 감독의 <Q에 대하여>, 두 영화 모두 사랑이라는 감정, 그중에서도 성소수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에게 묻는다. 우리는 과연 퀴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정수인 감독의 <Q에 대하여>에서는 동성애를 바라보는 몇 몇의 부정적인 시선과 동성애에 대해 느끼고 있는 솔직한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피켓 시위와 종교와 연관되어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영화에 등장한다. 퀴어에 대한 반감의 태도를 보이는 피켓 시위, 동성애는 사탄이 만든 것으로 큰 죄악으로 분류되는 현실을 우리는 영화를 통해 마주하고 있다. 송원찬, 오혜원, 권혁희 감독의 <내 목소리가 들려>에서는 열등감과 동성애라는 감정을 어떻게 영화에 자연스럽게 접목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흥미로웠던 것은 카메라 뒤에 있던 감독들이 직접 카메라 앞으로 나와 자신들이 생각하는 동성애에 대해 보다 과감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두 영화 모두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동성애에 대해 그 감정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스스로 고민하고 세상을 바라보도록 만든다. 

<내 목소리가 들려> 감독들은 이야기한다. 동성애라는 것은 어쩌면 나에게도, 나의 절친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동성애 또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듯 똑같은 하나의 사랑이라고. 이러한 현상들은 나쁜 것이 아니며 동성애 또한 하나의 같은 사랑이기에 우리는 더욱 편견 없는 시선으로 동성애를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높여 보여주었다. <Q에 대하여> 정수인 감독은 성소수자들에 대해 더 깊고 세밀하게 보여주어 그 감정을 느끼는 것 또한 틀린 것이 아니기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똑같이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 속 우리의 태도 또한 되돌아볼 수 있었던 다큐멘터리. 우리의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들에 대해 오늘도 생각하고 나의 곁을 관찰하게 된다. (홍지희)

수평적인 관계, 순종과 맞서는 첫 걸음

<검은 프레임>(박승희)과 <탕자>(최승민)를 보고

제도권 교육에 대한 고민, 무엇인가로 부터 벗어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자퇴, 어머니, 딸의 권력관계가 보이는 작품들이다. <검은 프레임>은 액자구조로 주인공을 등장시키며 자신의 자퇴를 고민하고 있는 한 사람 박승희, 가족과 식사 자리에서 박승희는 자퇴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들에 대해서 반론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어머니는 짧은 대화에서 자퇴에 대한 박승희의 의향을 제압해 버린다. 화면에서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수평적이지는 못하다. 고민하는 한 사람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박승희는 자퇴에 대한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지는 못하다. <탕자>는 어머니로부터 훈계받는 최승민의 모습이 보인다. 어머니께서 얘기하시는 순종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자퇴를 해도 열심히 살 수 있다’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하는 상황이다. 어머니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면 반항이 생길 수 없었을 것 같애’라고 하신다. 어머니는 자퇴에 대한 최승민의 생각을 반항으로, 순종하지 못한 결과가 자퇴인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이다.

<검은 프레임>에서는 제도권 학업 문화와 멀어지면 큰 일이 생길 것 같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가족들 사이에 감정의 과잉으로 나타난다. 고민을 털어 놓고자 하는데 오히려 혼나는 분위기, 탈선하려는 존재를 제압하는 가족관계에서의 위계질서라고 생각하면 서글프다. <탕자>에서는 자녀가 자퇴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는 지 진심으로 염려하고 걱정하기 보다는 순종, 반항의 결과로 자퇴를 하려는 최승민을 이해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들뢰즈가 제시한 “리좀”처럼 엄마와 딸의 관계가 뿌리과 식물처럼 수평적인 관계 맺기 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고 딸들이 존중받기를 바란다. 자퇴에 관련하여 혼돈이 온다는 박승희에게는 문제에 정면으로 조우하라고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렵고도 드물다”는 스피노자의 저서 『에티카』의 마지막 문장이다. 최승민의 힘겹고도 많지 않은 고귀한 삶이 되기를 바란다. ‘오랜 시간 고민하고 선택하는 자퇴는 반항이었을까’, ‘내가 순종을 했다면 자퇴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감독 최승민의 내레이션이 귓가에 맴돈다. 언제부터인가 자녀의 대학진학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평가를 받는 자의 입장을 취하게 되는 현실이다. 어떤 직업을 가져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사회, 입시 지옥이 없는 세상, 존중받고 수평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가족, 불안을 해결해 주는 사회가 되길 진심으로 염원한다. (김기봉)

여성 청소년은 왜 질문할까?

<바람>(정혜인), <탕자>(최승민), <¹®±úÁü½ºÆ®>(김해은)를 두고

여성 청소년은 자신의 다큐멘터리에서 왜 질문하는 걸까. 무수한 질문이 득달같이 달려와 꼬리를 물 것이다. 그럼 남성 청소년은 질문을 안 하나.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는 매우 보편적인 연출법이 아닌가. 그래도 질문하고 싶었다. 여성 청소년은 왜 질문할까? 대부분의 다큐멘터리에서 타인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는 사실, 결국 연출자 자신의 사고와 판단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영화 안에 자리를 잡는다. 아카이브 안에서 살펴본 무수히 많은 청소년 다큐멘터리도 예외가 아니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자신에게 유리한 추출물로서 존재하는 인터뷰 조각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여성 청소년들의 다큐멘터리는 조금 달랐다. 자신의 외모 콤플렉스를 고백하는 정혜인 감독의 <바람>, 자퇴를 결심했지만 엄마의 양보 없는 반대에 봉착한 최승민 감독의 <탕자>, 젠더와 성별에 따라 부여되는 역할과 미래에 대해 반문하는 김해은 감독의 <¹®±úÁü½ºÆ®> 세 편 모두 질문을 위해 질문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엄밀히 말해 선명하게 그러했다. 수행으로서 질문하기라고 해야 할까. 타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나를 영화를 거울삼아 자신에게 다시 비추는 일인 것이다. 이들의 영화에서 인터뷰는 냉정하게 말하면 비경제적이고 비효율적이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영화 속 질문의 누적은 의도한 대로 혹은 의도치 않게 수행성의 미학을 만들어낸다.  

정혜인 감독은 친구에게 말한다, 너를 앞에 두고 하는 인터뷰이지만 이건 사실 결국 나를 향한 인터뷰라고. 최승민 감독은 엄마의 반대 의사를 지속적으로 확인하면서도 자기 판단에 점점 확신을 갖게 된다. 가볍지 않은 폭력 앞에서 몇 개의 건조한 이미지를 나열하며 결기를 드러낸다. 김해은 감독은 성 역할에 대한 자기 주변의 일반적인 감각에 작은 못을 심어놓으며 이상한 공기, 묘한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협상이 아닌 대결로서 인터뷰, 앞으로의 생애 과정에서 펼쳐질 일상적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으로서 다큐멘터리. 결코 우연의 산물만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 테다. (임종우)

어디까지는 괜찮고 어디서부터 틀린 것인가?

<덕덕덕>(최승민)과 <탕자>(최승민)를 보고

2016년 <덕덕덕>, 2017년 <탕자> 이렇게 두 작품을 한 여성 청소년의 기록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다. <덕덕덕>에서 “오타쿠”의 이미지에 대한 친구들의 의견을 묻고 <탕자>에서는 “자퇴”에 대한 엄마의 의견을 묻는다. <덕덕덕>에서 친구들의 의견과 <탕자>에서 엄마의 의견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두 작품에서의 의견들은 공통적으로 일정부분까지는 괜찮고, 용납이 가능하지만 어느 선 이상으로는 용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괜찮은 것이고 어디서부터가 틀린 것일까? 두 작품에서 모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는 것에는 질문 자체에 모순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캐릭터 코스프레는 남들이 보기에 이상하니까’, ‘자퇴는 멋모를 나이의 반항이니까’, 틀린 것일까. 사회적으로 틀리다고 정의 내리기 이전에 코스프레를 하며 즐거워하는 취미 활동과 자퇴를 결정할 때까지의 깊은 고민을 알아야 한다. 

두 작품을 통해 그가 얼마나 무수한 선들에 의해 탕자가 되어 왔는지 짐작이 됐다. <덕덕덕>의 경우 다수의 친구들에게 질문을 하고 다양한 상황이 나오면서 사회적 선에 대해 말하고 있고 이에 대해 자신은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탕자>의 경우 좀 더 내밀하지만 적극적이었다. 자퇴에 대한 엄마의 생각과 대립되는 자신을 보여주고 자신을 탕자라고 지칭하면서까지 결정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소재가 달랐지만 두 작품 모두 최승민 감독은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묵묵히 대항하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틀릴 수 있지만 자기 자신만은 확실하다는 생각이 코스프레 축제 걷고 학교 밖으로 묵묵히 걸어 나가는 그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이건욱)

10대 여성 영화에서 나타난 대안적 응시로서의 ‘듣기’

<minifather>(이민희), <to 그대에게 편진>(박효정), <비타민 인생>(김해은)을 통해서

로라 멀비, 카자 실버만 등 많은 여성주의 영화이론가들은 1960대부터 꾸준히 ‘관음증적 응시’와 ‘대상화되는 여성의 몸/목소리’에 대해 논의를 이어왔다. 영화는 카메라 혹은 카메라 뒤에 선 감독의 시선으로 하여금 한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게 ‘윤리적 문제’에 대해 계속 질문할 수밖에 없고, 다큐멘터리의 경우는 그 질문이 더 강하게 작동한다. 이 질문은 관음증적 응시에서 탈피한 ‘대안적 응시’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하였다. 
 
이번에 본 <minifather>, <to 그대에게 편진>, <비타민 인생> 세 편의 영화는 10대 여성 감독들의 ‘대안적 응시’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특히, 이 3명의 10대 여성 감독들은 대안적 응시의 방법으로 ‘(영화 속 주인공의 삶을 주의 깊게) 듣기’를 하고 있다. 이들의 작품은 일상이라는 것에 가려진 주인공들의 이면들을 발견하고, 듣는다. 이민희 감독은 금연에 도전하는 아버지 일상을 들으며, 아버지의 삶을 다시 발견하고 있다. 박효정 감독은 편지라는 것을 통해 부모님이 지나온 시간들을 듣고, 그 위에 자신의 시간을 비춘다. 김해은 감독은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족이라는 관계 안에서의 나를 다시 생각한다. 그들의 작업 방식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무수히 스쳐간 타자를 발견하게 한다. 3명의 10대 여성들이 듣고자 했던 이야기를 통해서, 관객들은 잠시 자신의 일상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산다. 살아간다.”라는 것에 의미를 다시 되짚어보게 된다. (명소희)

불가피한 선택과 강박에 대하여

<10대 그리고 외모>(손종은)와 <XXKg>(송세현)을 보고 든 생각 

어른들은 항상 말했다. “네 나이땐, 아무것도 안 해도 예뻐.” 이 말은 정말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어릴 땐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어른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지랖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야 어렴풋이 느낀다. 지나가는 학생들만 보면 참 풋풋하면서도 안타깝다. 여학생들의 화장과 다이어트 시기가 점점 빨라지고 점점 어려진다. 온전히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지 못하고, 강박적으로 자신의 옥죈다. 

영상의 시작은 아침부터 열심히 공들여 화장에 집중하는 여학생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곧이어 밥먹으라고 소리치는 엄마, 밥먹을 시간은 없으면서 화장할 시간은 있냐고 나무라는 엄마. 내 기억에 정말 밥 먹을 시간은 없다. 왜냐 화장을 해야 오늘 하루를 보낼 ‘내’가 되니까. 나 또한 학교를 가기 전 1시간 30분이라는 긴 시간을 꾸미는 데 소요했다. 그렇게 부지런할 수가 없었다. 헐레벌떡 여학생이 잔뜩 화장품이 든 파우치를 챙기고 나서 학교로 장면이 전환된다. 그리고 꽤 시간을 화장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학생들의 대화에 초점을 맞춘다. 거울을 돌려가면서 보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어려운 화장품 이름을 되새기며, 서로 추천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수업시간에도 칠판보다는 조그만 거울에 집중한다. 수업시간이 끝나고 하교를 하기 전까지도 화장은 계속된다. 학교를 나온 길거리는 온통 세일을 한다는 화장품가게들이 줄 지어 있다. 자연스럽게 학생들은 한 매장을 들어가 옷을 고른다. 학생들이 입기엔 꽤 고가의 옷들이다. 이 옷, 저 옷 대본다. 교복에 잘 어울리는 일명 ‘교복템’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또 장면이 전환되어 급식을 먹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한 친구의 음식을 남기면 다른 친구들이 집어간다. 그 학생은 다이어트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미상관으로 다시 화장을 공들여 하고 있는 여학생의 모습이 보이고, 엄마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프레임아웃하고 타이틀이 뜬다. <10대, 그리고 외모>.

화장을 중점적으로 다룰 것 같다가 짧게 짚고 가는 옷과 다이어트. 짧게 다룬 만큼 인상을 주지는 않지만 의도는 충분히 알겠다. 모두 외형에 관한 이야기이고, 이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학생들, 그들이 보내는 시그널. 타이틀을 뒤에 놓아 관객에게 주는 효과는 꽤 노골적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이거였어.” 10대의 여학생들의 외모집착에 대한 이야기. 좋지 않다는 것을 꼬집어 주고자 함과 반성의 의미, 그리고 그럴 수 밖에 없는 환경에 대한 이야기.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하고, 본분과 신뢰를 잃게 되는 행위. 이쯤되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자의적인 행동일까.’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 다큐도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외모에 집착한다고 생각하세요? 이 행동이 한심하고, 불편하세요? 하지만 저희도 어쩔 수 없어요.’ 살아야하니까. 이 행위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생존법인 것이다. 약한 10대가 거칠고 부담스러운 타인의 시선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위장법’. 왜 그렇게 집착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왔는지, 한발짝 뒤에서 바라보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과연 외모강박, 다이어트강박은 우리에게 어떤 걸 가져다주는 걸까.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하는 걸까. 화장과 다이어트가 외형적으로 잠깐 예뻐보일 수는 있으나, 우리의 내면은 썩어문드러지고 있다는 걸 사실 ‘알고 있다’. 알고있음에도 우리는 립스틱을 든다. 불가피한 선택은 정말 나의 선택일까. 아직도 정확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한순간에 놔버린다고 한들, 그것에 대한 불안감과 또다른 코르셋이 나를 옥죌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알고 있다. (조소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