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챕터를 읽고

내가 책을 고르는 기준

“좋은 책 말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나는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사람이다. 주로 사는 쪽의 파트를 맡아왔다. 책을 가지고 있는 것만 해도 마치 내가 교양 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좋았다. 실상 책을 잔뜩 사놓고는 제대로 읽은 책이 별로 없다. 이 책 읽다 끊기면, 다른 책 봤다가 그러다 전에 읽었던 책의 앞부분이 기억이 안나 다시 읽는다. 그러다 똑같은 부분에서 끊기면 그냥 머리맡에 두고 먼지가 쌓일 동안 손 대지 않는다. 분명 흥미를 끌었던 제목인데 말이다. 

나는 책을 살 때 무조건 제목과 목차, 사람들의 후기를 본다.  그리고 읽다 끊기면 찝찝한 소설보다 읽다 끊겨도 상관없는 자기계발서나 에세이를 좋아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읽지 못할 나를 잘 아니까. 어느순간부터 나의 목표는 한 권이 아닌 한 챕터가 되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책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앞으로 좋아할 책은 많다. 열어보지 못한 책들은 머리에 먼지가 쌓인 채 항상 나에게 눈치를 보내곤 한다. ‘이럴꺼면 왜 산 거야’ 흥미가 있는 책들도 이런 판국에 공부가 목적인 교재가 다 읽힐리 없다. 혹여 시험을 위해서 책을 다 읽었다 할지라도, 시험이 끝나면 짧은 여운을 주고는 사라진다. 선생님, 교수님께서 엄선하신 좋은 책은 나에게 그리 좋지 않다. 그런 책들은 대부분 무겁고, 부담스럽다. 

사람들이 자기계발서는 개개인에게 영양가가 없다고 말한다. 사람마다 환경이 다 다른데, 그 방법과 생각이 통하겠냐고. 그말에 완벽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난 그 사람이 낸 결과보다는 그 과정을 더 주의깊게 보는 편이다. 그 과정은 내게 심심한 위로를 건네준다. 그 심심한 위로가 어떤 좋다고 통칭되는 책들보다 비전문적이고, 가볍지만 넘기기 좋다. 그래서 자꾸만 손이 간다. 이처럼 좋은 책과 좋아하는 책은 엄연히 다르다. 나는 앞으로도 좋은 책보다는 좋아하는 책을 찾으려 노력할 예정이다. 그게 나에게 더 잘 맞으니까. (조소희)

뽑히는 글쓰기 특강을 듣고나서

“자소설 쓰는 어른들”을 읽고

취업을 공부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는데, 그것을 학습하는 방법이나 취업의 어떤 이론들 따위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하다. 여기서 말하는 이론은 굉장히 직관적이고 명확하다. “세 가지 원칙”, “반드시 지켜야 할 것”, “반드시 쓰면 안되는 것”과 같은 형식이니까 말이다. 취업 자기소개서 작성법을 알려준다던 “뽑히는 글쓰기” 강의는 최근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사람들 각자가 가진 고유의 언어가 손쉽게 잘려나가는 모습 뒤로 정말 오로지 뽑히기 위해 달려나가는 수십 편의 글을 보았다. 그 결과를 받고 안도감을 느꼈던 우리들이 불쌍했고, 한편 이것을 가르치는 강사로 뽑힌 강사도 안쓰러웠다. 모두 참 고생이 많다. (임종우)

한국에서 남자아이 키우기

“내 아이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를 읽고

한국 사회에서 남자 아이를 키운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몇 달 전, “한남충, 한남유충”이라는 표현으로 이슈가 되었던 논문을 읽었다. ‘한남유충’이라는 표현에 괜스레 내 아이를 떠올리며,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매 순간 나는 이런 걱정과 불쾌함 사이, 어중간한 위치에 서게 된다.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고민하지 않았을 일들을 무수히 생각한다. 그리고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되도록 내 아이 역시 같은 고민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나라는 사람 안에서 나온 타자, 아이’를 먼저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최근 논문을 쓰면서, 타자를 환대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듣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큐멘터리라는 것이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타자의 삶을 열심히 듣기 위해 애쓰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물론, 지금의 난 매일 아침마다 아이의 말대답에 더 독한 말로 응수한다. 뒤돌아서서 ‘좀 더 착하게 말해줄걸.’ 생각하지만, 인생 8년차 아이의 말대답이 가끔 나의 신경을 긁는다. 아무튼… 은유 작가의 글을 읽으며, 나의 삶과 작업의 고민을 마주하게 된다. 아마도 나는 꽤 오랫동안 ‘내 아이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라는 걱정과 불쾌 속에서 아이와 함께 답을 찾아갈 것 같다. (명소희)

학원 빠지는 문화

“자꾸 학원을 빠지는 아이에게”를 읽고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교수님이 수업을 빨리 끝내거나 휴강을 하면 너무나도 좋아한다. 우리는 초 중 고등학교 때부터 항상 그래왔다. 하지만 그때와 대학교는 다르다. 대학교는 한학기 몇백만원을 주고 오는 청소년 교육기관과는 다른 곳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때의 강제성을 교육에 대응하는 습관이 대학교까지 온 것이다. 또한 대학교 가서 놀아도 된다는 시한 폭탄과 같은 말을 심어주어 많은 사람들의 학점은 상승곡선을 보이고 복학생이 무섭다 라는 말을 낳았다. 1,2학년때 놀고 취업에 가까워지면 뒷수습하기 바빠지는 것이다. 어떻게 교육할지 고민하는 것 보다 왜 교육해야 해고 받아야하는지 고민하게 됐다. (이건욱)

"나"를 소개한다는 것은

“자소설을 쓰는 어른들”을 읽고

자기소개서, 말 그대로 나 자신을 소개하는 글이다. 일을 구할 때에도, 면접을 볼 때에도,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에도 나는 아직까지도 스스로를 상대방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고민이 있다. 최근 취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기소개서를 쓰는 칸을 보고 문득 겁이 났다. 사실 나 자체를 설명하는 것보다 내가 지금까지 이 길을 위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것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또한 내가 하는 이 일에 붙기 위해 쓰지 말아야 할 단어들, 혹은 문장들에 대해 인터넷을 서치하고 꼭 정답이 있는 것 마냥 그렇게 나를 꾸며낸다. 돌아보면 나 또한 입시를 준비하던 학창 시절에 꾸며진 나를 소개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지금껏 살아온 나보다 이러한 경력을 가진 나로 평가받는 것. 오로지 뽑히기 위해서만 써진 글들이 과연 무슨 힘이 있는 것인지, 아직까지도 나는 그렇게 나를 포장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괴롭고 겁이 난다. 오로지 나 그 자체로 세상에 나아가는 방법, 먼저 나 스스로부터 꾸며지지 않고 있는 그 자체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홍지희)

있는 그대로 미사여구가 없는 담백한 글

“자소설 쓰는 어른들”을 읽고

'내 마음 만큼 일하는 세상, 내 일한 만큼 갖는 세상' 가수 연영석의 [간절히]라는 노래 후렴 구절이다. '비슷한 임금, 동등하게 사람 취급 받는 사회가 될 때라야 [자소설]이란 단어가 소멸 할 수 있으리라', [자소설 쓰는 어른들]의 마지막 문장이다. 그 여운이 씁쓸하다. 몇 해 전 아내가 근무하는 00000복지센터에서 글쓰기 수업이 진행되었다. 그리고는 한 두 달 후 아내의 글 몇 편이 '작은 생각'에 실렸다. '작은 생각'은 노동자가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취지로 발간되는 월간지이다. 아내의 글이 실렸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당시 기억을 떠올려본다. 얼마나 글을 잘 썼나 싶어서 차근차근 읽어보았다. 짧은 문장, 미사여구가 전혀없는 글이었다. 투박한 글들, 진정성이 느껴진다. 보통 글을 쓴다고 할 때 온갖 꾸민 단어들, 매끄러운 문장을 구사하려는 것이 사람 마음일게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자기소개서 까지 포장히고 과장해야 하는 현실이다. 자기소개서가 가공되어 자소설이 되어가는 시대이다. 나도 여지껏 자기소개서를 어떻게 써내려갔는 지 반성해본다. 이제는 자소설을 쓰는 상황이라면 연필을 내려 놓고 있을 것 같다. 언제면 있는 그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세상이 될까. (김기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