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챕터를 읽고

질병의 정의

"질병 없는 인생은 불완전할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를 읽고

질병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감기나 당뇨병, 암 등이다. 우울증과 정신적 질병은 아마 한참 뒤에나 아예 생각이 안 날수도 있다. 우리는 정신병과 친숙하지 않다. 정신적 질병은 비감염성 질병으로 격리 대상도 아니지만 우리는 그 흔한 감기보다 더욱 거리감을 느낀다. 친구가 한번 지금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정신과를 가보려고 했지만 아빠가 가지말라고 했다고 한다. 나중에 그 기록들이 취업이나 사회생활할 때 문제가 될 수있다고 한다. 우리들은 정신적 질병을 질병 이상으로 생각한다. 정신병은 질병이며 의학으로 나을 수도 있고 낫지 않을 수도 있는 인간의 질병일 뿐이다. "저 오늘 좀 우울해서 조퇴해야 할 것 같습니다"가 자연스럽게 말하는 날이 와야할 것 같다. (이건욱)

당사자인가, 당사자여야 하나, 당사자여도 되나

“그렇게 당사자가 된다”를 읽고

당사자라는 단어는 앞으로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어떻게든 정치일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뒤로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두 가지 기억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한예종_내_여성혐오”가 학내 구성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이슈가 되었을 때 나는 영상원 영상이론과 여학생 동료들을 대신해 학교 신문사 인터뷰에 임했다. 나는 영상원 인터뷰 참여자 중 유일한 남성이었고, 유일하게 이름을 공개한 사람이었다. 이때 우리 시대 페미니즘 실천에서 나의 당사자성을 치열하게 질문해보았다. 언제인가 디아스포라 영화제를 연구할 때, 왜 여성영화, 성소수자 영화, 인권영화 전반을 디아스포라 영화라는 범주 안으로 포섭하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모 평론가는 모두 디아스포라가 돼봐야 한다고 했다. 되어본다는 건 뭘까. 그때 나는 모두가 디아스포라가 된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디아스포라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며 비판했다. 여전히 모르겠다. 거듭 돌이켜봐도 당시 내 생각과 판단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틀린 것 같기도 하다. 당사자는 발언에 있어 신뢰와 파급력을 갖기도 하고 동시에 너무 많은 폭력과 억압을 감수해야 한다. 당사자성 바깥에서만 보이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쉽게 건조한 방관자가 되어버린다. 결국에는 감수성을 어떻게 키워나갈지 문제인가 싶다가도 감정이 실천을 담보하지는 않으니까. (임종우)

배우고 익힌다는 것

“올드한 당신”을 읽고

나는 꽤나 많은 시간을 인스타그램을 하며 보낸다. 지인들의 게시물도 보고, 전혀 일면식없는 사람들의 게시물도 보고, 시각적 재미를 주는 게시물들을 보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계속 빠져든다. 그리고 내 게시물도 점검한다. 나의 게시물은 주로 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지만 실상 타인의 시선에 맞춰져 있다. 예쁜 사진, 좋은 글들을 기록한다는 것과 타인에게 비춰질 나의 이미지의 조각들이 모여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특히 우리 부모님이 나의 게시물을 보는 것을 알기에 더욱 조심스럽게 올리는 것도 있는 것 같다. 두 분 모두 나와 인스타그램친구가 되어있다. 남들은 이해하지 못해도 나는 그것이 딸을 타지로 멀리 보낸 부모님을 생각했을 때는 중요한 소통창구가 된다고 생각한다. 나또한 '잘 살고 있으니 걱정하지마!'라는 묵언의 의미를 담아 올린다. 그래서인지 부모님도 크게 걱정을 하고 내가 가는 행보에 대해서 믿어주시는 편이다. 적어도 거짓말로 게시물을 올리지 않으니까. 
  
엄마와 아빠는 게시물을 올리지는 않지만 알고리즘에 이끌려 자주 들여다 보시는 것 같다. 남들은 부모님이 인스타그램을 하는 것을 놀라워 하지만, 충분히 배우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가능하다고 본다. 엄마, 아빠보다 더 젊은 이모, 삼촌들이 어려워서 안한다는 것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 사는 백세인생이라면 우리는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고, 성장하고 발전해야한다. 느긋하게 세월을 보내기엔 시대가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앞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나이불문하고 배우고, 익혀야한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조소희)

잊을 수 없는 기억에 대해

“성폭력 가해자에게 편지를 보냈다”를 읽고

평범한 날이었다. 수업 도중 학생주임 선생님은 여학생들 치마 길이를 검사한다고 모두 칠판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앞자리에서 우리를 바라보던 몇명의 남학생들의 수근거리는 소리. 사실 선명하게 나의 귀에 들려오는 그 말들을 나는 무시할 수 없었다. 우리반 여학생들의 다리를 보고 순위를 매기는 소리 … 우리는 앞에 있던 몇명의 남학생들에게, 담임 선생님께, 학생부장 선생님께도 이야기 하였지만 돌아오는 말은 그저 장난이었고, 어려서 그랬고, 너희가 참으면 되는 것이었고, 아무튼 미안하다 그뿐이었다. 십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이게 과연 장난일까, 정말 어려서 그랬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기에 잘못된 것임을 모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무도 그들에게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던 그 때, 그건 잘못된 말이었다고 다시 그들을 마주한다면 꼭 말해주고 싶다. (홍지희)

창작한다는 것, 살았다는 것

“작가의 연봉은 얼마일까”를 읽고

작가가 되어 글을 쓰며 생계를 유지해 보려는 의지는 없다. 중학교 2학년 무렵 예쁜 노래 가사들을 옮겨 적으며 나만의 시쓰기를 동경한 적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현실을 알게 된 건 20대 후반 즈음 자연스레 알게되었다. 특히 문화예술활동 경우 전업작가는 생계 유지를 위한 또하나의 일자리가 이원화되어야 하는 현실, 그리고 “작가의 연봉은 얼마일까”를 읽으며 서글픔이 느껴졌다. 최근 운좋게 13인전 창신절벽예술제를 준비한 바 있다. 물론 생계에는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전시준비를 하면서 작업을 구상하고 촬영하고 편집하면서 묘한 긴장감, 설레임, 살아있음을 느꼈다. 좋아하는 것, 원하는 것 문화예술활동을 하면서 살 수는 없을까! 잠시 멍때려본다. 그러면서 다시 업무에 임한다. 그래도 내가 동경하는 것들을 하나 하나 이루며 살아보자. 그렇게 노력해보자. 아직 살아 있지않은가. (김기봉)